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문단 편집) === 순수하지 않았던 쿠데타 측 === 가담자들이라고 해서 전부 자신들의 저서에서 주장하거나 언론에서 보도했던 것처럼 인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가담자 중 [[아르투어 네베]] 경찰중장은 무려 '''[[아인자츠그루펜]] B'''의 지휘관 출신으로, 벨라루스 지역의 민간인들과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고 절멸수용소라는 아이디어를 최초로 입안한 자였다. 그리고 국방군 병참감 [[에두아르트 바그너]] 대장은 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공조하여 국방군과 친위대 사이의 협력 지침을 마련하고 동부전선에서 파르티잔 토벌전을 명목으로 벌어지는 대량 학살을 총감독했다. 쿠데타 주역이었던 [[헤닝 폰 트레슈코프]] 소장도 전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그는 제2군단 참모장으로 재직하던 1944년에 건초 작전(Heuaktion)으로 알려진 폴란드 청소년 [[유괴]] 작전을 직접 실행했다. 그가 유괴한 5만 명의 아이들은 독일화 교육을 받는다는 명목으로 독일 영내의 노동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에 종사하였으며 심지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지기도 했다. [[에리히 회프너]] 상급대장은 개인적으로는 무장친위대 토텐코프 사단의 범죄행위를 매우 싫어하던 인물이었으나 정작 자신도 학살에 적극 부역했다. 그는 히틀러가 내린 인종주의를 철저하게 신봉했으며 '''유대-볼셰비즘과 모스크바의 아시아 놈들'''을 뿌리부터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부집단군 소속으로 제4전차군을 이끌 당시에 [[프란츠 발터 슈타흘레커]] 친위소장의 [[아인자츠그루펜]] A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협력에 힘입어 아인자츠그루펜 A는 [[발트 3국]] 지역 유대인들을 거의 전부 살해했다. 심지어 가장 충실한 반나치 인사 중 하나였던 [[빌헬름 카나리스]] 해군 대장조차도 [[전쟁범죄]]에 일부 책임이 있다. 그는 [[아프베어|방첩국]] 국장으로서 국방군의 [[게슈타포]]라는 평가를 받던 비밀 야전 경찰의 책임자이기도 했다. 비밀 야전 경찰은 독일 점령지 곳곳에서 파르티잔 토벌전을 명목으로 숱한 학살을 벌였다. 그리고 카나리스 대장도 그들이 [[정치장교 명령]]에 따라 [[소련군]] [[정치장교]] 포로들을 [[고문]] 및 [[학살]]하는 것을 승인한 바 있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이 명령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방첩국 국장으로서 이를 승인해야 했다. 1930년대부터 이어진 기나긴 반(反) 나치 행적 덕에 카나리스 대장의 이러한 범죄 가담 행위는 일부 참작되거나 넘어가는 편이지만 그런 그조차도 나치 범죄에 있어 완전히 깨끗한 인물은 아니었다.[* 사실 빌헬름 카나리스는 나치에 환멸을 느끼기 전까지는 스파르타쿠스 봉기 당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의 살해에 연관된 정황과 카프 폭동에 가담하였다는 의혹이 있는 등 철저한 반공 극우 인사였으며 이외에도 각종 우익 테러 사건이나 당시 독일 국가방위군의 불법 재무장 사건에 연루되는 등, 반 바이마르 공화국 행보를 보였으며, 심지어 나치 집권 초기에는 재무장이라는 차원에서 나치의 집권을 열렬히 환영하기도 했다. 그가 반나치 인사로 변한 것은 작센하우젠 수용소의 참상을 목격한 충격에 더해 나치의 무모한 군사적 도박이 독일을 파멸시킬 것이라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